Bible Insights: 74개의 글

- 카인과 아벨 -

Posted by 김간사
2014. 5. 3. 11:00 Bible Insights

김간사의 Bible Insights
- 카인과 아벨 -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세기 4:3~8


철야 예배를 드리면서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면서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십니다. 
보통 아벨은 양의 피 흘리는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카인은 곡식을 드려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해석이 있는데, 만약 피흘리는 제사만 받으시길 원하셨다면 그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사 드리라고 명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제사를 드린 카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제사를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셨을 것이라는 해석도 하시는데, 좀 더 묵상해 보면 카인은 회개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카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드린 제사의 근본적인 잘못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데서 기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형식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음이 없는, 소위 영혼 없는 예배를 자신의 땀과 노력을 드려 제사라는 형식을 갖추어 자신이 아끼는 곡식을 바칠 때, 이것을 받는 대상은 그가 드린 수고를 알아 줘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대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본전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로의식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거절 되었을 때 당연히 화를 내거나 흥분하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내가 드리는 이 제사를 안 받으실 수 있지??" 이런 반응의 원인은 받으시는 대상을 묵상하기 보다 내 공로 내 의지 나의 수고.. 나 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대상에게 쏟는 수고가 수고처럼 느껴지게 될까요?

신앙의 출발이 나 중심이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의 만족을 위한 예배, 내가 받아야 되는 위로, 세상에서 내가 잘 되어야 한다는 축복 신앙.. 이 모든 것이 위험한 신앙의 출발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카인은 이미 그러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아가 예수님을 판 가룟인 유다도 동일한 이유로 회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사랑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도 예수님께 회개하기 보다 스스로 목매어 죽는 쪽을 선택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어떠한 용서도 구할 수 없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사를 성경에 삽입한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사를 드리는 예배자를 찾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창4:4,5)

하나님은 제물과 함께 나 라는 존재 자체를 받기 원하십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렸다에 촞점이 맞춰진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과 교제했다는 예배가 진실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했던 어떠한 수고도 아깝지 않은 것처럼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아들 주심으로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모든 것 드려 아깝지 않은 사랑으로 보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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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 -

Posted by 김간사
2014. 3. 11. 10:31 Bible Insights

김간사의 Bible Insights
- 상실 -

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6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17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18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19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에스겔 24:15~19


당시 에스겔은 자신의 행위나 퍼포먼스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대언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너무 가혹한 말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스겔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말씀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라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심정..
사람에게 가장 큰 상실은 배우자의 상실이라 들었습니다. 
가족 중에서도 부모님, 자녀의 상실도 물론 큰 아픔이겠지만 사랑하는 배우자의 상실은 더 없는 아픔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마음을 아실 것 같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랑하는 선지자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하셨다는게 믿기지 않습니다.
더 가혹한 것은 그 현실을 받아 들이면서 절대로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보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묵상 해 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렇게 가혹한 상황을 만들어 이스라엘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성경에서의 결론은 구절 하반부에 등장합니다.  너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마음을 빼앗긴 그것을 일시에 제거하여 버림으로 허망함과 허탈을 경험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난 단편적인 의미 보다는 좀 더 깊은 하나님의 마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하여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멸망 시키면서 그 사랑 이스라엘을 잃어 버리셨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그 아름답고도 외로운 사랑을 상실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물도 흘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를 징벌하시면서 마음 속으로 밖에 울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 인자(Son of man)라 불리웠던 선지자 에스겔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 말씀을 그렇게 행동으로 순종하지 않았을까요?

동시에 이것은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을 때도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 표현한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그 십자가의 잔 받는 것을 거두어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는 마음을 묵상 해 봅니다.
사랑하는 하나뿐인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아픔..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향해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외치는 그 모습 속에 하나님의 마음은 무너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울 수 없었습니다.  눈물도 흘려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죄가, 이 세상의 인간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 해 봅니다.
도저히 인간으로 참을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한 아픔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 아픔과 눈물을 참을 수 밖에 없으신 하나님..
그 결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
바로 당신과 저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다시금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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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시 -

Posted by 김간사
2014. 3. 9. 14:14 Bible Insights

김간사의 Bible Insights
- 동일시 -

1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찌니 
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  

신명기 20:16~18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둔 출애굽 2세대에게 다시금 하나님은 그곳의 모든 것들을 멸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긍휼히 여기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잔혹한 하나님의 면이지 않을까 생각되면서 왜 하나님은 이렇게 잔인한 명령을 하셨을까요?
그냥 홍해를 가르는 그 놀라운 기적으로 가나안 땅을 천재지변과 같은 방법으로 다 쓸어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 보내 잘 먹고 잘 살게 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백성을 잘 먹이려는 목적으로만 부르셨다면 그렇게 하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목적이 있었기에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멸하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쓰셨습니다.

보통 우리는 직장에서 상사들이나 선배들 혹은 부모님께 어떻게 하라는 지시나 명령을 받습니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지시를 받은 것만 행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왜 그 지시를 했는지 생각하면서 좀 더 주도적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시킨 일 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일 시킨 사람의 의도와 그 뜻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지시를 시키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 그 주인처럼 일을 행하지 않을까요?

내가 만약 저 출애굽 시대에 태어나 저러한 명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진보된 삶, 광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동식물의 소출, 그리고 그들이 섬기고 있는 음란한 신들과 문화..
그러나 다 죽일 수 밖에 없는 현실들.. 그리고 나의 칼에 죽임 당하는 저들..
그러면서 생각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소위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것, 물질 만능주의, 쾌락과 음란을 추구하는 문화.. 이런 것을 싫어하시는 구나..
죄 없어 보이는 선량한 얼굴을 한 사람들을 내 칼로 죽이면서 손이 떨릴 것입니다.  연민을 느끼면서도 죽일 수 밖에 없는 현실..  사랑이라는 하나님도 이런 마음이실까?
그들에게서 목숨을 뺏는 잔인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묵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세상적인 음란한 문화에 물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연민과 아픔의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리를 심판하실 수 밖에 없으실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을 심판할 때 하나님의 사람을 쓰실 수 있습니다.
그 때는 그 일을 시키신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판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고 내 삶도 잘 못하면 이럴 수 있구나 하는 반성과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심판 당하는 그들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되어 그들과 동일시 한 모습으로 그 상황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심판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동시에 묵상해야 합니다. 
불쌍하다고 심판하는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의 모습일 때는 이해하지도 경험할 수도 없는 그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몸소 체험하시면서 우리의 연약한 인간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냥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것이 아닌 그 몸을 인간과 같이 되셔서 그렇게 모든 연약함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하시는 인간을 대신해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내 이웃을 위해서도 동일하게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나 역시도 그 이웃을 위해 그들과 함께 그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도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사랑이라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내가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니깐 상대에게 아메리카노를 선물하는 것으로 사랑이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상대가 커피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 아메리카노는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내 사랑의 표현이 상대방을 모른다면 자칫 내 만족을 위한 사랑이 되어 버립니다.

중보기도라는 것 역시 그와 동일시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나의 모든 상황이 그 중보자의 당한 상황으로 받아 들이면서 그 사람의 아픔이 마치 내 아픔이 되어서 어떻게 하나님께 구해야 할지 알아 내는 것..
그리고 그렇게 그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부르짓는 것..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하나님께 구하는 것!!
이것이 중보기도의 올바른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동일시함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심판 당하는 사람의 마음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중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마음..
이 마음이 바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우크라이나의 민주적 시위를 무력 점령의 명분을 삼은 러시아를 행태를 보면서 우크라이나를 중보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 가운데 우리의 모습을 성찰 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 해 봅니다.
세상 모든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과 온전한 우리의 자세를 다시금 생각해 보며 기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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